7주차 [이영환 목사의 영적 장자권을 회복하라] “3년 안에 성전 건축 못하면 평생 낙도에서 목회”

이영환 장자권목회연구소 대표(앞줄 왼쪽 다섯번째)가
 1980년 대전 한밭제일교회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수련회 발표회를 가진 뒤 기념촬영을 했다.


1978년 대전 남산교회 담임목사님이 갑자기 사직해 교육전도사였던 내가 목회를 대신했다. 첫 주일 낮 예배는 노회에서 목사님이 파송됐다. 오후에 교회에서 회의가 열렸다. 저녁이나 새벽은 내가 할 수 있지만 주일 낮 예배가 문제였다. 주일 강단을 위해 노회에서 목사님을 계속 파송하느냐 하는 문제로 제직회가 열렸다.


당연히 주일 낮 예배만은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하는 쪽으로 결론이 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대부분의 제직들이 교육전도사인 내가 설교하는 게 더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교회는 내게 강단의 전권을 위임했다. 후임 목사님이 오실 때까지 주일 낮부터 새벽예배까지 모든 목회를 경험했다.


당시 대전신학교 3학년이던 나는 고등학생인 남자 조카 둘을 데리고 자취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 밥해 주랴, 도시락 싸주랴, 빨래하랴, 학교 공부하랴 분주했지만, 목회 전반을 경험하는 게 너무 좋았다. 신바람이 났다.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설교 시간이 기다려졌다. 강단에 서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 죄인이요, 양들이었다. 다 살인자요, 간음자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두려울 리 없었다. 마음껏 목소리를 높였고 원 없이 강력하게 말씀을 선포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강단 아래서 사람을 마주 보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지만, 강단에만 서면 힘이 났다. 설교의 구성이야 어찌 됐건 선지자적인 담력으로 과감히 말씀을 선포했다. 아무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육전도사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지 못했다. 소위 영적 권위가 발동되기 시작했다.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이면서 목회에서 완전한 해방을 누리고 있었다.


교육전도사로 2년 남짓 교회를 섬기면서 행복을 누렸다. ‘세상에 이런 행복이 어디 있을까.’


얼마 후 교회는 신실하신 목사님을 새 담임으로 모시게 됐다. 존경하는 이운상 목사님이었는데, 목사님과 사모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다. 좌충우돌, 제멋대로 설치는 나를 두 분은 조용히 지켜봐 주셨다. 때론 격려해 주시고 참아주시면서 내 움직임에 전혀 제동을 걸지 않으셨다.


그분들을 섬기면서 2년을 참 행복하게 지냈다. 그곳에서 목회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했다. 목회 담력을 얻었고 비전을 싹 틔웠다. 오늘의 쉽고 가벼운 목회현장을 그곳에서 경험했다. 목회를 쉽고 가볍게 갈 수 있는 자산을 얻었다. 남산교회는 날마다 사역 현장에 리듬이 있게 하고 순간마다 사역에 율동이 있게 한 곳이다. 남산교회는 내 꿈과 그리움, 영적 사역에서 행복의 모태였다. 무엇보다 남산교회를 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거기서 아내 송순근 사모를 중매로 만났다.


80년 1월 2일 결혼 후 아내와 새로운 결단을 했다. 당시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개혁으로 나뉘면서 섬기던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됐다. 주류인 예장합동이 아니라 비주류인 개혁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시골교회에 가기로 했지만 이미 교단이 달라진 상황이어서 갈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개척해야 했다. ‘우선은 갈 곳이 없으니 도시에서 개척한다.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리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확실하게 개척을 돕기로 한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책 없이 신용협동조합에서 380만원을 융자받아 건물을 얻어 개척했다.


80년 3월 15일,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대전 중구 유천동 249-3번지에서 감격 어린, 황홀한 목양의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다. 세계적인 비전을 꿈꾸게 한 영광스러운 목양의 탯줄을 내 어찌 끊을 수 있으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나를 너무 잘 아셨다. 본래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 하는 나를 하나님은 그대로 사용하셨다. 목회를 결단할 때나 교육전도사 때도 전혀 준비 없이 출발케 하시더니 개척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척에 대한 사전 지식도, 단독 목회에 대한 어떤 밑그림도 없는 상태였다.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미지의 세계가 전혀 불안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무언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인생의 주사위를 던졌다. “3년 안에 성전 건축, 못하면 평생 낙도(落島)다.”


당시로선 무모한 도전이었고 선포였다. 어쩌면 내 안에는 두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나는 고향처럼 자리 잡은 시골교회에 대한 진한 향수, 하나는 교육전도사를 통해 경험한 도시 목회의 또 다른 매력, 이 두 가지 경험 사이에서 곡예를 하고 있었다. 전혀 손해 볼 이유가 없는 곡예였다. 끝까지 줄타기를 잘하든, 미끄러지든 둘 다 연착륙이었다.


교회 개척을 했지만 신혼인데다 아직 서울 방배동 총회신학교에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비장한 마음이 생겼다. 이미 목표가 정해졌고 화살은 시위를 떠난 상태였다.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3년이다. 3년 안에 무언가 결말을 내야 한다.” 실패해서 시골로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다만 정해진 목표에 다다르고 싶은 승부욕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뿐이었다.


▒ 장자권은 이것이다    
  하나님 닮은 거룩한 삶은 죄와 싸워 이기는 것  


이영환 목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인 장자들이다. 장자들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하나님을 닮은 삶은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 명령 앞에 거역할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거룩한 삶, 과연 거룩한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가. 그 길은 오직 하나, 죄와 싸워 이기는 길이다.


성경은 계시록에서 이기는 자에 대해 아주 선명하고 진하게 강조하신다. 결론은 하나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기는 자만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하신다고 선포하셨다. 이 말씀이 암시하는 건 무엇인가. 이기지 못하면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면 생명 강가에 있는 생명 과실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생명의 강가에 열두 가지 생명 과실을 먹을 수 없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위의 말씀에 의하면 둘째 사망은 무엇인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자들이다. 거기가 어디인가. 바로 지옥인 것이다. 이기지 못하면 이렇게 비참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또 있다. 같은 의미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위의 말씀에 의하면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는다. 흰옷은 천국의 옷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은 자들이 입는 옷이다. 어린 양의 피로 그 옷을 깨끗하게 한 자들이 입는 옷이다.


여기서 우리가 깊고 진하게 새겨 넣어야 할 말씀이 있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리라”는 놀라운 말씀이다. 이 말씀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기지 못하면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울 수도 있다는 준엄한 경고다.


그렇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상속자인 장자들이 마귀에게 계속 패한다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우실 수 있는 절대주권을 가진 분이시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거룩한 성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이기는 자들이다. 이기는 자만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을 수 있다. 이기는 자, 그는 누구이며 무엇을 이기는 자인가. 아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기려면 싸움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누구와 싸우며 무엇과의 싸움인가.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죄와 싸우라.” 죄와 싸우는데 어떻게 싸우라 하시는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 하신다. 무슨 의미인가. 생명을 걸고 싸우라는 것이다. 죽기까지 싸우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허공을 치는 싸움을 한다면 백전백패이다. 대적을 분명히 알고 그를 향해 검을 날려야 승리할 수 있다. 우리의 대적은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의 정욕이다.


그런데도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은 이긴 자를 이만희 교주라고 지칭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신천지에서 열린다고 해괴한 주장을 한다. 성경의 일부 단어를 갖고 심대하게 왜곡한 것이다. 천하보다 귀중한 영혼을 사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반사회적 종교집단인 것이다.


바울은 싸움의 대상을 바로 간파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싸워야 할 대상임을 명쾌히 관통한 것이다. 그는 싸움의 대상이 자기 몸의 정욕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 몸을 쳐서 말씀 앞에 복종시키는 선한 싸움을 마지막까지 잘 했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0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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