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주차 [이영환 목사의 영적 장자권을 회복하라] 생사화복이 내 혀에 달렸다… ‘입술의 선포’ 훈련

대전 한밭제일장로교회 성도들이 1994년 11월 대전 도마동 구 예배당에서 추수감사주일 찬양을 하고 있다.


주님과 깊은 밀담 후부터 목양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마음의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가장 시급한 것이 38년 왕 노릇을 해왔던 부정적 자아관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주님과의 ‘사랑 잔치’가 있었던 날부터 내면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메뚜기 사상(민 13:33)이 계속 공격했다. 모태에서부터 ‘이 아이를 죽여야 해’라는 거절감, 어머님께 사랑받지 못했던 유년 시절 상처로 형성된 낮은 자존감은 태산 같은 장애물이었다.


‘우선 합당한 말씀을 찾아 그 말씀을 붙들고 나를 치료하자.’ 잠언 말씀을 붙들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0~21)


기도 중에 이 말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다. 생사화복이 내 혀에 달렸다. 내가 혀를 쓰는 대로 그 열매를 먹는다.’ 매일 이 말씀을 외쳤고 예배 시간마다 선포했다.


지금도 한밭제일장로교회는 주일마다 입술의 선포를 훈련한다.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어땠습니까.” “좋았습니다.” “오늘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이번 한 주간 어떨 것 같습니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일생이 어떨 것 같습니까.” “무지무지하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입술을 여신대로 이뤄질 줄 믿습니다.” “아멘, 아멘.” “여러분이 입술을 여신 대로 일생이 무지무지하게 행복할지어다.” “아멘, 아멘.”


나는 미래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누구든 그의 미래는 오늘의 입술에 달려 있음을 말씀을 근거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늘 내 삶은 과거 내 입술의 열매다. 내일의 삶 역시 오늘 입술의 열매임이 분명하다.


1980년대 중반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내가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님을 특별히 존경하는 이유가 있다. 열등의식으로 똘똘 뭉쳐있던 나는 조 목사님을 통해 많은 도전을 받았다. 나도 조 목사님처럼 거울을 보고 자신을 향해 긍정적 선포를 했다. “영환아, 너는 한밭 제일의 목사가 될 거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거울 속의 내가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웃긴다, 웃겨. 너 같은 게 무슨 한밭제일교회 목회를 해.”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말을 받아 내 안의 내가 화답하는 것이었다. “그래, 맞아. 나 같은 게 무슨…. 한밭 제일 목양은 아무나 하나 뭐.”


나는 한동안 거울을 보며 씨름을 했다. 아무도 없는 강단에서, 길을 걸으면서, 거울 앞에서 계속 선포하고 다녔다. “영환아, 믿음을 가져. 너는 한밭 제일의 목양을 할 수 있어.” 말씀으로 자신을 가꿔가기 시작했고, 그 선포로 길고도 어두운 부정의 터널을 뚫고 나올 수 있었다.


하나님 말씀은 위대했다. 말씀은 내 안의 문제들을 순식간에 깨끗이 날려 버렸다.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당시만 해도 아내와 오순도순 이야기하지 못했다. 내 잠자리는 여전히 강단이었고 아내는 강단 밑에서 기도하며 잤다.


한밭 제일 목양의 비전을 아내에게 알려줘야 했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하면서 입을 열었다. 내 딴엔 비장한 각오로 했다. “저기, 있잖아. 주님이 나보고 한밭 제일의 목양을 하래.”


이 짧은 말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어렵게 입을 열었는데 아내의 반응은 별로였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면서 툭 내뱉었다. “잘해 보세요.”


이 한마디가 전부였다. 어쨌든 아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다음은 교회에 선포하는 일이었다. 강단에서 선포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말을 선포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도 솔직히 두려웠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제게 한밭 제일의 목양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명실공히 한밭제일교회입니다.”


의외로 성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느 한 사람도 비웃거나 농담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놓으셨던 터라, 모든 성도가 너나 할 것 없이 예배당 천장이 떠날 만큼 “아멘, 아멘”을 외쳤다.


한밭 제일 목양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이상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마음에서 돌아갈 다리를 끊어버렸다. 주님의 명령 앞에 죽어도 이 역사를 이루리라는 결단과 함께 더욱 기도에 매달렸다.


기도하면서 성도들의 그릇을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움직였다. 합당한 말씀을 주시라 기도했고 주님은 꿈틀대며 살아있는 말씀을 주셨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나는 이 말씀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기 시작했다. 말씀 선포는 성도들의 마음 문을 열었다. 선포된 말씀이 그들의 마음 그릇을 키우기 시작했다. 성도들은 말씀의 위력 앞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비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한밭 제일의 목양에 대한 청사진대로 주춧돌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 장자권은 이것이다
보이지 않는 성령의 힘… 이 세계를 누리는 것이 신앙


이제 네 번째 질문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확실하다면 나는 당연히 이 권세를 누려야 한다. 내가 누리는 이 권세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권세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이 보이는 것, 잡히는 것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영의 세계가 보여야 한다.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영안이 열린 자들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주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말씀하셨다.(요 3:5~6) 살리는 것은 영이다. 사람은 구성 요소가 육과 영으로 돼 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이뤄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과학 문명은 다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 먼저 이루어지고서야 현실이 돼 우리 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바라봐야 할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누리는 것이 신앙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는 두 힘이 존재한다.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다. 성령의 힘이다. 성령님이 감동하셔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다. 이 말씀의 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만물을 통치하신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또 하나의 힘이 있다. 악한 영의 힘이다. 사탄, 마귀의 힘이다. 더럽고 악한 영들의 힘이다. 그들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게 오늘 우리에게 큰 과제다. 이 세상에 그 어떤 힘도 악한 영의 세계를 이길 수 없다. 세상 권세로도 이길 수 없다. 지식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고 재물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다. 육신의 체력으로도 이길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는 힘이 영적 세계의 힘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이 힘과 싸워야 한다.


어떻게 그 악하고 더러운 힘을 이길 수 있는가. 이 세계를 이길 힘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힘이다. 말씀의 힘이다. 말씀의 힘만이 이길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것이 확실하다면 이 악하고 더러운 영의 세계를 정복할 수 있어야 한다.


마크 트웨인이란 미국의 작가가 있다. 그가 명작을 남겼는데 ‘왕자와 거지’라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두 아이가 한 아이는 왕의 아들인 왕자로 자랐고, 한 아이는 빈민가의 거지로 자랐다. 소년이 됐을 때 왕자와 거지가 옷을 바꿔 입어 신분이 바뀌게 됐는데, 핵심은 진짜 왕자다. 그는 거지 옷을 입고 빈민가에서 온갖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당당하다. 누구에게나 자신 있고 당당하게 명령하고 선포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속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짜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옷을 바꿔 입어 왕자의 신분을 얻게 된 가짜 왕자는 어떠한가. 비록 왕자의 옷을 입고 왕자의 보좌에 앉아 있어도 좌불안석이다. 매사에 자신이 없다. 늘 기가 죽어 있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다. 왜 그러한가. 그 자신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가. 담대하고 자신 있게 명령하고 선포하면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이영환 목사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06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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