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주차 [이영환 목사의 영적 장자권을 회복하라] “주님, 못난 저를…” 부르짖자 사역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영환 장자권목회연구소 대표가 지난해 8월 우간다 르웨르에서 열린 
차고라니 미니스트리 주최 콘퍼런스에서 목회자들과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일단 대전 남산장로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을 했으니 교육 사역을 해야 했다. 그 분야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나는 특유의 소리 지르기를 시도했다. 앞이 캄캄할 때는 주님께 부르짖는 것밖에 더 있으랴. 때로는 금식도 하고 때로는 기도원도 찾았다. 주로 교회 강단 앞과 작은 골방에서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말씀을 부여잡았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살아 역사하고 계셨다. 말씀의 위력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새삼 깨닫기 시작했다. 말씀과 성령의 파워는 가히 상상을 초월해 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의 말씀에 잡혀 부르짖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부르짖을수록 사역의 걸음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내 안에 불안이 사라지고 있었다. 두려움도 옛말이었다. 아주 오랜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어느 순간, 아주 삽시간에 내 주위에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가 일고 있었다. 어떻게 교회학교 설교를 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중고등부를 인도했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렇게 부르짖기 시작하자 무엇인가 일이 되고 있었다. 해야 할 사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역의 우선순위가 잡히고 있었다.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두려움의 대상이던 사람들도 내 눈과 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목회는 고목처럼 속을 푹푹 썩어야 하는 줄 알았던 나로서는 분명 이변이요, 기적이었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오직 말씀 한 구절, 부르짖음 하나로 완전한 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부터 부르짖는 목회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부르짖을수록 놀랍도록 힘을 부어 주셨고, 새로운 세계로 과감한 비행에 시동을 걸어 주셨다.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능력은 실로 측량할 길이 없었다. 매사에 자신 없던 내가 항상 충만했고 자신감이 넘치기 시작했다. 대인관계가 제로였던 내게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회의 중직자들도, 집사님도 어렵지가 않았다.


지금도 고목처럼 속을 썩어야 목회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목사들이 많다. 그러나 목회를 재미있게 하는 분들은 ‘목회처럼 쉬운 것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서 목회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모든 사람이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장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뼈를 깎고 피를 마르게 하는 가파른 속도전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목회는 어떤가. 아주 열악한 낙도나 두메산골이 아니라면 대부분 교회가 인구 밀집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옆의 교회가 부흥되니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가. 교회 부근에 대형교회가 있어서 내 교회가 부흥이 안 되어 열 받는가.


분명한 것은 여전히 80% 이상의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절규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영혼들이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목회는 상대적 경쟁이 아니다. 목회는 ‘절대 정복’이다. 우리의 정복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목회 현장이다. 눈을 들어보면 지금도 그 영혼의 처참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들의 부르짖음이 들리지 않는가. 아무리 큰 교회가 버티고 있어도 여전히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산재해 있는 것이 한국교회 현실이다.


신앙생활은 상대평가가 아니다. 절대평가다.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그분이 내려 주신다. 목회는 사람을 상대로 하지만 사람을 의식하거나 비위를 맞추어서는 안 된다. 목회는 하나님 한 분만 기쁘시게 해 드리면 된다. 얼마나 재미있고 신바람 나는 일인가.


간혹 동료 목회자 가운데 상당히 오랫동안 목회를 해왔음에도 여전히 사람을 의식하면서 사람의 지배를 받는 분들이 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목회자가 장로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고, 권사 집사 때문에 가슴이 까맣게 탄다면, 그가 왜 그 현장에 있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그때 나는 20대였다. 나이가 어렸음에도 성도들을 보는 눈이 제대로 떠가고 있었다. 연세가 드신 중직들을 볼 때도 내가 섬겨야 할 한 마리 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목자가 되고 그들이 양으로 보이니 장로님이나 집사님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나를 두렵게 하거나 괴롭히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었다. 잘 섬기고 먹여야 할 양, 여전히 목자의 보살핌과 인도가 필요한 양일 뿐이었다.


그런데 1978년 초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전혀 예고도 없이 담임 목사님이 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으로 임지를 옮기신 것이다. 교회에선 난리가 났다. 후임자 인선도 할 겨를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혼란은 더 컸다. 그 날부터 교육전도사인 나는 담임 목사님의 목회를 대신해야 했다.


이영환 목사

▒ 장자권은 이것이다
하늘나라 상속자… 예수님 닮은 구별되는 삶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 상속자인 장자들은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는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천국 상속자라면 천국 시민에게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만약 내가 입술로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상속자인 장자라 외치면서, 정작 삶은 천국 상속자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면 그는 말로만 믿는 자이지 진짜 믿음을 가진 자라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천국 상속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여러 가지로 접근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당신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을 우리에게도 요구하신다. 거절할 수 없고 불순종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인 장자라면 반드시 거룩한 삶을 살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 백성으로 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거룩이 무엇인가. 거룩이란 구별됨이다. 거룩이란 성결한 삶이다. 거룩이란 깨끗한 삶이다. 누구든지 구별되게 살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자라 말할 수 없다. 그 누구라도 성결한 삶을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라 말할 수 없다. 깨끗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


진정으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었다면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요 장자들인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어떤 곳인가.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그 천국은 거룩한 성이다. 그 성에 들어가는 자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깨끗하게 된 자들이다. 거룩한 자들만 가는 곳이 천국이다. 그 천국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천국은 죄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은 각종 더러운 죄를 버려야 한다. 죄와의 싸움에 이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음란함부터 각종 죄를 멀리하고 물리쳐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살전 4:3~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누가 천국에 들어갈 자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주여, 주여’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우리의 거룩함이다. 거룩한 삶을 위하여 우리의 음란한 삶을 버려야 한다.


이 마지막 세대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음란과의 전쟁일 수 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음란하고 추악함으로 가득하다. 각종 미디어에 등장하는 음란함은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세대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음행과의 전쟁을 치러 승리해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하나님의 아들이자 장자인 우리, 하나님의 자녀이자 천국 상속자인 장자들은 오직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오직 예수님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한다. 주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빠, 아버지이신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자녀이자 상속자인 장자들의 본연의 의무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00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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