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차 [이영환 목사의 영적 장자권을 회복하라] 매 앞에 굴복한 후 마음 속엔 절망·자학의 가시 자라

이영환 장자권목회연구소 대표가 2016년 ‘한국교회, 
오직 기도만이 해답이다’라는 주제로 대전 한밭제일장로교회에서 열린 전국 목회자 세미나에서 참가자들과 기도하고 있다.


1956년 기 싸움에서 기절한 나는 어머니께 무조건 항복했다.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집안 누구에게나 조건 없는 순종이 시작됐다. 힘에 밀려 무지막지하게 매를 맞은 후에 찾아온 것은 공포라는 무조건적 반사 반응이었다.

어머니의 매와 날카로웠던 눈빛에 대한 두려움이 언제나 나를 짓눌렀다. 잘못하면 또 맞을까 두려워 언제나 “예”였다. 사랑 대신 채찍에 굴복한 후엔 바보 수준을 조금 넘어설 정도로 무기력하게 자라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겉으로 보기에는 얌전하고 착한 아이였다. 자의와 상관없이 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속에서 내가 살아 움직이려는 순간, 뇌리에 박힌 어머니의 부릅뜬 눈이 강하게 압도했다. 그 눈앞에서 나는 한 마리 초라한 벌레로 주저앉았다.

매를 맞다가 기절한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바보처럼 착하게만 살았으니 욕을 할 사람도 없었다. 백치처럼 매사에 “예”였으니 누가 시비할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의 내면세계는 비참할 만큼 얼룩진 상처투성이였다. 형과 달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날 힘들게 했다.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잘못하면 또 매 맞을라, 그날부터 피동적인 아이로의 정서가 고착돼 어떤 일에도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허튼짓을 하려면 어머니의 매가 가슴을 스쳐 갔다.

사람들을 보면 뭔가 불안해져서 마음으로 대중을 피하게 됐다. 겉으로는 보통 아이였지만, 안에서는 무서운 독버섯이 자라 내면세계를 온통 좌절과 절망의 피동적 세계로 덮고 있었다. 제동장치에 고장이 난 살인적 자아가 강하게 살아 발동하면서 창조주의 풍성한 사랑과 생명을 빼앗긴 채, 자신에게 사망의 독을 들이붓고 있었다.

“너는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아.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넌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야.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 같은 것은 있으나 마나야. 너 같은 것이 뭘 할 수 있겠어.”

이렇게 자신을 향해 독설을 쏟아 놓는 부정적 자아에 맞장구를 치는 내가 있었다.

‘그래, 맞아. 나 같은 것이 뭘 할 수 있겠어. 집에서도 인정받지 못하잖아. 어머니한테도 사랑받지 못하잖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 같은 것은 누구한테도 필요하지 않아. 차라리 죽어버릴까.’

매 사건 이후로 어머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착한 아이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과 관심을 끄는 유일한 길이였다. 늘 형에게만 시선을 주는 어머니셨지만, 간혹 내가 착한 일을 하면 칭찬해 주셨다.

특히 어머니를 도와 부엌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물을 길어오거나 감자껍질을 벗기거나 채소를 뽑아오고 씻는 일 등 누나들이 주로 하는 일을 했다. 어머니가 들에 나가 일하실 때면 밥을 해 놓고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께서 칭찬해 주셨다.

그 결과 겉으로 보기에는 집안에서나 마을에서 문제없는 착실한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내 안에 절망과 자학의 가시들이 점점 자라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 채 말이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안고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아무런 꿈이 없었다. 그때는 너나없이 먹고 살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저 쌀밥이나 실컷 먹고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는 것이 꿈이라면 소박한 꿈이었다.

시골 동네는 계몽이 되지 않아 겨울이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여서 화투를 쳤다. 민화투, 육백, 나이롱뽕, 섯다, 도리짓고땡, 고스톱 등 못하는 화투가 없을 만큼 화투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화투가 재미있고 좋으니 커서 노름꾼이나 될까’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게다가 어렸을 때 이름이 원구였으니 매번 아홉만 나오면 돈을 따는 화투와 뭔가 연결되는 것 같았다.

내가 장래 무엇을 한다든지, 무엇이 되고 싶다든지,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꿈은 염두에 없었다. 인생이란 여정에서 비전이란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는지도 모른다.

공부에도 관심이 없어서 줄반장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줄반장은 고사하고 개근상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1년에 대여섯 번은 결석했다.

집안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공부에 재미도 없어서 충남 연산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고등학교를 포기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던 나는 대책 없이 세월을 허비하는 좀벌레였다.

그 시절 그래도 감사한 것이 하나 있다. 독서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다른 데 쓰지 않고 대전으로 올라가 중앙시장과 중교다리 부근의 헌책방을 돌면서 책을 사들였다.

당시에는 독서가 유일한 낙이었다.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다 친구가 돼줬다. 아무도 나를 향해 비웃지 않았고 따돌리지도 않았다. 내가 책 속의 주인공들이 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 기쁨을 대신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직접 사람 앞에 서면 두려웠지만, 책 속의 사람들과는 격의 없이 친숙할 수 있었다. 비록 책은 좀 읽었다지만 별다른 것 없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던 때였다. 1967년쯤 내 삶을 향해 살며시 다가오시는 분이 계셨다. 바로 예수님이셨다.

이영환 목사
▒ 장자권은 이것이다
어린양 예수 피로 구원 얻은 장자들


장자권이란 문자 그대로 장자의 권세다. 장자권이 장자의 권세라면 장자가 있어야 한다. 장자는 누구인가.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출 4:22~23)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장자였다. 아들인데 장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장자들을 애굽에서 내보내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바로가 거절하니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인다고 선포하셨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출 11:4~5)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다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선포였다. 왕의 장자로부터 심지어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장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애굽 땅에 사는 하나님의 장자들인 이스라엘의 장자도 다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장자를 살리실 놀라운 계획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장자들만을 살려낼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이겠다고 선포하셨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다.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이달 열나흩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5~7)

하나님은 당신의 장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려고 특별조치를 취하셨다. 그것이 어린 양의 희생인 것이다. 이제 구원의 핵심인 결정적인 말씀으로 들어가 보자.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2~1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 12:23)

누구든지 어린 양의 피 안에만 오면 다 구원을 받았다. 그 안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의 피 안에 온 자들이 다 하나님의 장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과 관련해 중대한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과연 누구를 위해 흘린 피란 말인가. 바로 하나님의 장자를 위한 피다. 첫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의 장자들을 살리기 위한 희생 제물이었다. 그렇다면 첫 유월절의 어린 양은 누구를 예표하고 있는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가. 어린 양의 피와 하나님의 장자의 관계다. 분명히 어린 양의 피는 하나님의 장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피였다.

구약에서 짐승인 어린 양의 피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장자였다. 이것이 진리라면 신약에서 참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장자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래서 어린 양 예수님의 피 안에서 구원받은 내가 바로 하나님의 장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m.kmib.co.kr/view.asp?arcid=092409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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